지속 가능한 사회로 전환하기 위해 전 세계가 주목하는 핵심 전략 중 하나가 바로 '생산자책임재활용제도(EPR: Extended Producer Responsibility)'이다. 이 제도는 제품을 생산하거나 유통하는 기업이 제품의 사용 후 발생하는 폐기물 관리 및 재활용 책임까지 지도록 규정하는 정책이다. 과거에는 폐기물 처리를 주로 소비자와 지방정부의 몫으로 돌렸지만, 이제는 환경 부담을 ‘생산 단계’부터 줄이고 순환 경제 체계를 구축하기 위해 생산자의 책임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
EPR은 단순한 환경 규제가 아니라, 자원순환 구조의 혁신을 이끄는 정책 도구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기업은 친환경 설계(Eco-Design)를 통해 폐기물 발생 자체를 줄이고, 재활용이 용이한 소재를 선택하도록 유도받는다. 소비자는 환경부담금을 통해 올바른 가격 신호를 받아 친환경 소비를 촉진하게 되며, 정부는 사회적 비용을 줄이는 동시에 순환 경제 목표에 다가갈 수 있다.
본 글에서는 한국, 일본, EU라는 세 지역의 EPR 운영 방식을 비교 분석한다. 한국은 아시아에서 가장 적극적인 제도 시행국이며,
일본은 업계 자율성과 재활용 기술 혁신을 강조하는 모델을 구축했다. 반면 EU는 세계에서 가장 포괄적이고 강력한 법적 틀을 기반으로 글로벌 표준을 형성하고 있다. 각국의 정책 차이를 살펴봄으로써, 한국이 향후 나아갈 방향과 국제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교훈을 도출해 보고자 한다.
한국의 EPR 운영 방식과 성과
한국은 2003년부터 본격적으로 생산자책임 재활용제도를 도입했다. 당시 급격히 증가하는 플라스틱 포장재와 전자폐기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존의 소비자·지자체 중심의 폐기물 처리 방식에서 벗어나 생산자 책임을 강화한 것이다. 현재 한국의 EPR은 종이 팩, 유리병, 플라스틱, 스티로폼, 전기전자제품, 타이어 등 다양한 품목에 적용된다.
한국 EPR의 특징은 환경부 산하 한국환경공단이 제도를 운영·감독한다는 점이다. 생산자는 재활용 목표량을 할당받고, 이를 이행하지 못하면 재활용부담금을 납부해야 한다. 또한 의무 이행 여부는 매년 평가되며, 이를 충족하지 못하면 과징금이 부과된다. 이러한 강제적 구조 덕분에 한국은 아시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재활용률을 기록하게 되었다.
실제로 한국은 포장재 재활용률 70% 이상, 전자폐기물 회수율 80% 이상을 달성했다. 특히 플라스틱병의 경우, 2019년 이후 무색투명 페트병 별도 분리배출 정책과 결합하면서 재활용 품질이 크게 개선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과도한 포장 문제와 기업들의 최소 비용 이행 전략, 즉 ‘실적 맞추기식 재활용’이라는 한계가 지적된다. 따라서 한국의 EPR은 강력한 제도적 틀을 갖추었으나, 질적 개선을 위한 추가적 혁신이 필요하다.
일본의 자율 규제 기반 EPR 모델
일본은 1990년대부터 ‘순환형 사회 구축’을 목표로 다양한 폐기물 정책을 시행했다. 특히 1995년 포장재 재활용법(Containers and Packaging Recycling Law), '1998년 가전 재활용법(Home Appliance Recycling Law)'을 도입하면서 사실상 EPR 제도를 본격적으로 시행하기 시작했다.
일본의 특징은 업계 주도의 자율적 운영이다. 정부가 재활용 목표치를 직접적으로 부과하기보다는, 업계가 설립한 재활용협회나 공제조합이 시스템을 운영한다. 예를 들어, 포장재 재활용은 일본 포장재 재활용협회가 담당하고, 가전제품은 제조사 연합이 수거·분해·재활용 과정을 관리한다. 소비자는 가전제품 폐기 시 일정 비용을 부담해야 하며, 이 비용은 곧바로 재활용 체계 운영에 사용된다.
이러한 방식은 기업이 재활용 기술 혁신에 적극적으로 투자하도록 유도했다. 일본은 냉장고, 세탁기, TV 등에서 고순도 플라스틱을 회수하거나, 냉매 가스를 안전하게 처리하는 기술을 세계적으로 선도하고 있다. 그러나 단점도 있다. 자율 운영이다 보니, 일부 기업은 비용 부담을 회피하거나, 소규모 기업은 참여율이 낮은 문제가 발생한다. 즉 일본은 기술 혁신에는 강점이 있으나, 제도적 구속력은 상대적으로 약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EU의 강력한 EPR 규제 체계
EU는 EPR 제도를 가장 체계적이고 강력하게 운영하는 지역으로, 사실상 글로벌 표준을 형성하고 있다.
EU의 폐기물 정책은 1994년 포장재 지침(94/62/EC)에서 시작해, 이후 전자폐기물 지침(WEEE Directive), 배터리 지침, 플라스틱 전략(EU Plastics Strategy) 등으로 확대되었다.
EU의 EPR은 생산자 의무와 정부 감독이 매우 명확하다. 각 회원국은 생산자로부터 EPR 분담금을 징수하고, 이를 통해 재활용 인프라를 구축하거나 수거 시스템을 운영한다. 또한 제품 설계 단계에서 재활용성을 고려하도록 ‘에코디자인 지침(Ecodesign Directive)’을 의무화했다. 기업은 단순히 폐기물 처리 비용을 부담하는 것이 아니라, 제품 생산 단계에서부터 환경 영향을 최소화해야 하는 책임을 지닌다.
EU는 2025년까지 포장재 재활용률 65%, 플라스틱병 회수율 77%, 2030년까지 모든 플라스틱 포장재 재활용 가능성을 확보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이를 위해 '보틀 리턴 제도(Deposit Return Scheme)'를 확대하고 있으며, 전자폐기물의 경우에도 회원국별 최소 회수율을 강제한다. 따라서 EU의 EPR은 ‘법적 구속력’과 ‘시장 인센티브’를 동시에 결합한 모델로서, 글로벌 기업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세 지역 제도의 비교 분석
세 지역의 EPR 운영 방식은 각기 다른 특징을 보인다.
- 한국은 강력한 정부 주도형 제도로, 재활용률 달성에는 성공했지만 여전히 질적 개선 과제가 남아 있다.
- 일본은 업계 자율성을 바탕으로 한 기술 혁신형 모델로, 재활용 기술 수준은 세계적이나 참여율과 구속력이 낮다.
- EU는 가장 강력하고 포괄적인 법적 체계를 구축하여, 생산 단계부터 소비자, 재활용까지 전 과정에 책임을 부여하는 구조다.
이를 비교하면, 한국은 제도의 실행력에서 강점을 가지며, 일본은 기술 혁신에 강점, EU는 글로벌 규범화와 제도적 완성도에서 우위를 차지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세 지역 모두 공통으로 순환 경제 실현이라는 목표를 지향하며, 정책 방식의 차이는 각국의 경제 구조, 산업 특성, 사회적 합의 수준에 따라 달라지고 있다.
따라서 한국이 앞으로 배워야 할 점은 EU의 '생산 단계 설계 규제(Ecodesign)'와 일본의 기술 혁신 전략을 결합해, 단순히 양적 재활용률 확보를 넘어 고부가가치 자원순환 체계로 발전하는 것이다.
향후 전망과 시사점
EPR 제도는 앞으로 더욱 강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기후 위기와 자원 고갈 문제 해결을 위해, 각국은 단순히 재활용률 제고를 넘어 순환 경제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을 가속화하고 있다. EU는 2030년까지 모든 제품에 ‘재활용 설계 의무’를 적용할 계획이며, 한국 역시 2050 탄소중립 시나리오 속에 EPR 강화를 포함했다. 일본은 기술 혁신을 통한 글로벌 경쟁력 확보에 주력할 가능성이 크다.
앞으로 EPR은 다음과 같은 방향으로 발전할 것이다.
- 디자인 단계 강화: 친환경 소재 사용, 분해·재활용이 쉬운 제품 설계 의무화.
- 디지털 추적 시스템: 블록체인 기반 폐기물 추적, QR 코드 라벨링을 통한 재활용 이력 관리.
- 국제 협력 강화: EPR 기준의 국제 표준화, 다국적 기업의 공동 부담 체계 확립.
- 소비자 참여 확대: 보증금 반환제도(DRS), 리사이클 포인트제 등 인센티브 강화.
EPR 제도 비교를 통해 알 수 있듯이, 한국은 제도적 강제력과 실행력을 유지하면서도 EU의 법 제도적 완성도와 일본의 기술 혁신 모델을 접목할 필요가 있다. 결국 EPR은 단순한 재활용 의무가 아니라, 기업 경쟁력과 국가 지속가능성의 핵심 전략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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